- 백백교에 대한 개요
일제강점기인 1920 ~ 30년대에 가평에서 창궐했던 사이비 종교랍니다.
- 탄생
백백교는 시초를 거슬러 올라가면 동학에서 파생된 종교로 전신은 백도교이다. 정확히 말하면 1919년 백도교의 교주인 전정운이 사망한 후 교주 자리를 놓고 세 아들 간에 다툼이 일어나 각각 인천교, 백백교, 도화교로 독립했다. 1930년 죽은 전정운이 자신의 첩 4명과 신도 일가족 8명을 살해하고 암매장한 것을 비롯해 여러 범죄행각이 드러나면서 이들은 한 차례 철저하게 박살났답니다.
이 와중에 차남 전용해(1895년생으로 추정)는 무사히 도망쳤다가 돌아와 비밀리에 백백교를 재건했답니다.
남자아이와 여자아이용으로는 '동자주문', '선녀주문'이라고 해서 각각 '백응선(白應善)', '백선응(白善應)'이라는 3글자짜리 주문을 따로 외워야 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팔도(八道)주문, 몇백 번을 외운다면 신령을 볼 수 있게 된다는 통신(通神)주문, 옥황상제 다음 가는 능력을 부여해준다는 비장의 주문 등등도 있었다. 옛날 뉴스 아카이브를 잘 찾아보면 나오는데 어감들이 하나같이 이상하답니다.
종말의 날에 서양은 불, 동양은 물의 심판을 받아 인류가 멸망한다는 종말론을 내세웠다. 그리고 여기서 살아남으려면 백백교가 마련한 본소에서 생활하다가 물의 심판 날에 금강산의 피수궁(避水宮)으로 옮겨가면, 대원님(백백교 교주)이 불로장생하고자 하는 자는 동해 천리 밖의 신대륙 영주로 보내주고, 부귀영화를 원하는 자는 계룡산으로 인도한다는 말 같지도 않은 교리를 설파했답니다.
지금 우리가 볼 때는 그저 말도 안 되는 헛소리에 불과하지만, 당시는 일제강점기라 사회가 혼란했거니와 사람들이 무지해서인지 그 교세가 빠르게 확산되었다. 백백교는 홍보를 위해 폐광이 된 금광에 금을 숨긴 다음에 전용해의 힘으로 금광이 다시 터졌다고 속여 사람들을 모았다. 이는 홍경래의 난 당시에도 나왔던 고전적 수법으로, 조선시대 후기 각종 예언서들이 횡행할 때 유행한 해도진인설(海島眞人說)의 영향을 받은 것이랍니다.
백백교의 중심 교리는 '한 사람(교주)의 흰 것으로 천하를 희게 하자(一之白將欲白之於 天下地).'는 것으로, 이는 유불선 3교가 모두 성쇠를 거듭하며 3천년을 흐르는 동안 그 본질이 쇠퇴하고 거죽만 남았고, 이제 '백백교'라는 새로운 종교가 나설 때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가까운 장래에 조선이 독립하여 백백교가 통치하리라는 주장까지 했답니다.
- 범죄
교주 전용해는 학식이 전혀 없었다. 학식이 없으면 인성이라도 좋아야 하는데 인성까지 글러먹은 갱생 불가능한 인간 쓰레기라는 게 무식보다 더 큰 문제였다. 정신병에 걸린 것인지 모르겠지만 근거도 없이 스스로를 '신의 아들'이라 자칭하며, 불로장생과 부귀영화를 미끼로 신도들에게 과도한 헌금을 요구하는 등 사기행각을 벌였답니다.
또한 총참모 격인 이경득과 문봉주 등 간부들을 각지로 보내 예쁜 딸을 가진 부모들을 골라서 백백교에 입교시킨 뒤 그 딸을 전용해의 시녀로 바치게 하여 성*행했다. 전용해는 이렇게 끌어들인 젊은 여자들을 항상 첩으로 거느리다가 싫증나면 살해하는 것을 능사로 삼았다. 심지어 여신도가 임신을 했을 경우 비밀이 밖으로 새어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그 여신도와 태아까지 전부 살해했답니다.
이외에도 배교자, 교단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과 그 가족들도 함께 살해했다. 나중에는 이것이 더 심해져서 신자가 너무 많이 몰려서 먹여 살리기 힘들다고 죽이기도 하였고, 경찰에게 들킬까봐 죽이기도 했다. 또한 내부 다툼으로 부교주를 살해하고 매장까지 했습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백백교 내부에는 이른바 '부엉이 부대라고 불리는 첩보원들이 있어 신도들의 행동을 비밀리에 감시했는데, 신도들의 이상행동을 포착하면 그 즉시 간부들에게 보고하는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 그리고 '부엉이 부대'의 보고를 받은 간부들은 행동대원들을 시켜 신도들을 살해했답니다.
당시 체포된 간부 24명은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소학교[9]도 다니지 못해 무지해서인지 모두들 교주인 전용해의 속임수에 넘어가 그를 '신의 아들'로 믿고 그의 말에 철저하게 복종했다. 그리고 가족 신도들을 지역별 지부에 흩어지게 만들었기 때문에, 자신이 도망치면 다른 가족들이 살해될까 봐 복종하는 경우도 있었답니다.
훗날 조사받던 이경득과 문봉조 등의 진술에 따르면, 자신들도 이런 일에 회의감을 느껴 도망갈까 생각하기도 했으나, 그때마다 전용해가 다 꿰뚫어보고 있으니 허튼 짓 말라며 엄포를 놓았다 한다. 게다가 이경득은 전용해의 잔인함과 포악함을 알고 있어 어쩔 수 없이 따랐다고 한다. 심지어 나중에 전용해가 죽었다고 발표됐음에도 조사과정에서 늘 대원님이라고 존칭을 붙였다는 건을 보면 정말로 전용해를 신으로 믿었을 수 있답니다.
당시 수사의 한계로 백백교에 대해서 완전히 조사하지 못한 부분이 있지만, 광복 이전과 이후를 포함해도 전무후무한 살인 종교단체라는 사실은 분명하답니다
- 최후
조부와 부친이 백백교에 빠져 여동생을 교주에게 첩으로 바치고 전재산을 빼앗긴 유곤룡이란 청년이 교주 면담을 빙자해서 백백교의 악행을 욕하다가, 흥분한 전용해와 간부들과 싸우다 경찰에 이를 신고함으로써 마각이 드러났답니다.
1937년 일본제국 경찰은 8개월에 걸쳐 전용해의 아지트와 전국 각처의 백백교 비밀장소에서 시체 346구를 발굴했다. 물론 이들 외에도 희생자는 더 있을 것이랍니다.
전용해는 이날 도망쳐서 자취를 감추었다. 그는 자신의 얼굴을 아무나 보면 그 기운을 감당치 못해 죽게 된다면서 항상 흰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닌 데다 자기 사진 한 장 남기지 않았고 심지어 함께 잠자리까지 같이 한 여자들도 전용해의 얼굴을 함부로 보지 못하게 해서 그가 어떻게 생겼는지 아는 사람은 가까운 측근이나 가족을 제외하면 거의 없었답니다.